斷想-雜記-時論

'김상헌의 청백' (다산포럼 박석무님 글)에 붙여서

김덕현 2006. 1. 27. 09:51

 

아래 글은 전 국회의원인 박석무씨가 운영하는 다산연구소의 다산포럼에 실린 글입니다.

참고로 문정공(文正公) 김상헌님은 제게는 15대조가 되는 분입니다. 

 

제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오늘날에는 늘 청백한 것이 좋은 것은 아닌 것 같고 상황에 따라서는 좀 탁하고 검어야 할 것 같은데 늘 청백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아지는게 문제라는 생각입니다.

 

정도(正道)와 권도(權道)이 차이에 대해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正道는 말 그대로 사람이 따라가야 할 바른 길임에 반해, 權道는 (이 때의 權은 권세권이 아니라 저울추권이라고 함) 저울이 달아야 할 물건의 무게에 따라 저울추가 저울대의 중앙으로부터 좌우로 움직이는 것처럼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正道를 가리킵니다. 공자는 제자에게 '시동생이 형수의 손목을 잡아도 되는가?' 라는 질문을 통해 정도와 권도의 차이를 설명한 바 있습니다. 만약 평상 시에 시동생이 형수의 손목을 잡는다면 이는 인륜에 어긋난 것이니 정도가 아니지만, 물에 빠진 형수를 구하기 위해서 형수의 손목을 잡는다면 이는 한 인간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것이니 곧 권도라는 것입니다. 

 

중앙이라는게 아예 없는 사람들이 정도도 권도도 아닌 사술(邪術)에 의존해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될 때면 내 조상님의 고지식한(?) 청백과 원칙주의가 오히려 크게 여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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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헌(金尙憲)의 청백(淸白)

 

청음 김상헌은 조선의 사나이였습니다. 안동김씨 명문을 일으킨 훌륭한 선비이자 벼슬아치로 정승의 지위까지 오른 당대의 위인이었습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 남한산성에 피신했던 인조가 청나라 임금에게 항복하겠다고 항복서를 바치려하자, 청음은 그 항복서를 찢으며 나라의 정기를 살리자고 외쳤던 분입니다.

끝내는 화의에 반대한 척화파로 몰려 중국으로 끌려가 온갖 고초를 겪었던 것은 역사에 너무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세월이 하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

라는 시조를 읊으며 청나라로 끌려가던 김상헌의 기개는 대단했습니다.

역시 그런 선비는 벼슬살이를 하면서도 청백했습니다. 『목민심서』에는 그에 대한 칭찬이 자주 등장합니다. “김상헌이 벼슬살이에 청백했다. 어느 벼슬아치가 자기 부인이 뇌물을 받아 비방을 듣고 있음을 걱정하자, 김상헌은 ‘부인의 요구를 하나도 들어주지 않으면 비방이 그칠 것이다’고 일러주었다. 그 벼슬아치가 크게 깨닫고 그 말대로 하였다. 그 부인이 항상 김상헌을 욕하기를, ‘저 늙은이가 자기만 청백리가 되었으면 그만이지 왜 남까지 본받게 해서 나를 이렇게 고생하게 하는가’라고 했다는 것이다” (金淸陰尙憲 居官淸白有一官人 憂其婦女受賂有謗 公曰婦人所請 一不施行 則謗息矣官人大悟 一如其言 婦人常罵金公曰 彼老漢 自爲淸白吏足矣 何令人效之 使我喫苦如此)

청백리가 되는 방법을 가르쳐 준 이유로 욕을 먹는 김상헌, 그 욕은 얼마나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 욕인가요. 세상에 전해지는 말로 ‘베갯머리 송사’라는 말이 있습니다. 남편이 고관인 경우 부인에게 뇌물을 주면 가장 약효가 크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기도 합니다. 부인이 요구하는 바를 들어줄 수밖에 없는 약한 남자들에게 주는 경고의 말입니다. 아무리 부인에게 뇌물을 바쳐도 남편이 부인의 청을 들어주지 않으면 뇌물의 효험은 없어지고 부인에게 뇌물 바치는 일도 그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김상헌 같은 청백리에 그의 가르침을 실행한 벼슬아치, 오늘은 그런 분들이 그리워지는 세상이 아닌가요.

박석무 드림